학교 후배로부터 책이 도착했다. 거의 한 달 전쯤, 후배가 자기가 다 읽은 책을 보내주겠다며 신청자를 받길래 대뜸 한 권 신청해놓고 도착하지 않아서 까맣게 있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도착한 것이다.
책은 안 오고, 소식도 없고. 중간에 우편 사고가 발생했는지, 후배가 아직 안 보낸 건지, 아니면 기숙사가 아닌 서울 집으로 보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집에 갔을 때 보니 집으로 온 것 같지도 않아서... 공짜로 받는 형편에 달라고 재촉하기도 그렇고, 중간에 우편사고가 났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히 후배 미안하게 만들까봐서 없었던 일 치고 잊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도착한 것이다. 사실, 무슨 책을 달라고 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방에 들어와서 포장을 뜯어보니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가 들어있다. 시험기간이니까 나중에 읽어야겠다 싶으면서도 한 번 책을 휘리릭 넘겨 보는데 중간에 편지가 뚝 떨어진다. 자그마한 분홍색 편지 봉투에는 "S고등학교 15기 mystery 선배님께" 라고 적혀 있었고, 토끼가 그려진 결핵 스티커로 봉해져 있었다. 아, 여자애들은 뭔가 다르구나 싶었다. 모든 여자애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더 인상이 깊었다.
'거미 여인의 키스' by 마누엘 푸익을 신청해주신 mystery 선배님께. 라고 시작된 편지의 내용은 책에 대한 추천평이었다. 짧지 않은 글을 읽으며 그 정성에 감동하고 말았다. 단순히 뜻밖의 편지를 받아서가 아니라, 문학소녀다운 예쁘고 화사한 문체가 참으로 읽을 맛이 났다. 어쩌면 편지가 책만큼의 분량이었다면, 책보다도 편지가 더욱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정성스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얼마만인가. 책장에 끼워 놓고 나중에 천천히 읽으려고 했는데, 편지를 읽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책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답장을 할까?' 생각을 해보다가 일단 잘 받았다고 연락은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받았다는 연락을 달라고 하기도 했었으니, 답장을 쓰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얼마 전 지인의 누나로부터 음악 선물을 받았던 생각이 나서, 음악 선물을 하기로 했다. 마침 편지에서 Libertango를 언급하며 추천을 했으니, 마침 낮에 들은 탱고 음악을 선물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고른 곡이 이것.
A. Piazzolla의 Tango Fugata
유튜브 영상 중에 이것을 최고로 친 것은, 연주자들의 열정적인 모습 때문이다. 사실, 음악적인 면에서는 이 동영상과 비슷한,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영상은 몇 개 있긴 했지만, 이 연주자들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바이올린 소리가 덜 묻힌다든가, 반도네온 주자의 실력이 조금 낫다든가 하는, 그것도 아주 미세한 정도로는, 압도적인 비주얼 차이를 극복할 수가 없다. 게다가 어차피 음질이나 연주 면에서 피아졸라나 요요마가 연주한 음원보다 떨어지는 마당이다.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명연주를 제치고 내가 동영상을 택한 이유도 연주자들의 라이브 모습에서, 음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들을 보라. 라틴의 정열과 탱고의 절도와 비장미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나치게 요란한 곡을 선물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했지만, 이 곡은 내가 정말 좋아하고, 또 참 좋은 곡이라고 확신하니까 줄 수 있었다. Liber Tango의 정열을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정열과 비장미에 있어서 결코 그에 못지 않은 Fugata도 좋아할 것이다. 설사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Piazzolla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이들의 연주를 보는 것이 결코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형식적일 수도 있었던 책 선물을 이렇게 배려와 정성을 담아 주니 참 기쁘고 고마웠다. 철이 들면서 좋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또 좋은 선물을 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 것 같다. 아마, 시간과 관심, 그리고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누군가에게 좋은 선물을 해보고 싶다. 자꾸 말하게 되지만 그런 마음이 들도록 만든 선물을 주어서 그 후배에게 참 고맙다.
//
이건 보너스.
Fugata - Black Tango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탱고는 내게 있어서 발보다는 귀를 위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도 그렇지만 요즘은 춤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김연아의 <록산느의 탱고> 연기 이후부터야 비로소 귀를 위한 탱고 이외의 것도 조금 보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