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치 않은 침묵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딱 오늘처럼 봄햇살 살랑살랑살랑 거리는 날이었던 것 같다. 친하게 지내던 어느 친구와 종로에 만나서 놀기로 했던 날이었다. 점심에 만나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었다. 무슨 영화였던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유행하던 그렇고 그런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 청계천 주변을 조금 걸었다. 그 친구는 한미은행에서 돈을 전부 찾은 뒤 우리은행에서 모바일뱅킹을 등록하고, 나는 은행에서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무슨 책이었는지도 기억속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심각하고 딱딱하고 두꺼운 책이었던 것 같다. 이윽고 친구가 나왔고, 다시 종로로 돌아간 우리는 그친구가 추천하는 어느 아이스크림 집에 들어갔던 것 같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장소가 이야기 나누긴 좋겠다 싶은데다, 그 친구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무지무지 좋아하는 것 같았다. 생각대로 맛은 여느 요구르트 아이스크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지만 정말 맛있다며 같이 먹었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집에서 한시간 반 정도를 쉬고, 우리는 피씨방에 들어가서 한시간 정도 게임을 하고 헤어졌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날의 일이 오늘까지 기억에 남은 이유는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집에서 보낸 시간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먹고는, 그냥 있었다. 마주 앉아보며 아무 말 없는 것이 나는 너무 어색하여, 이 말도 해보고, 저 말도 해보고, 하였으나, 화제는 금방 바닥이 났고, 뭐라고 해야할 지도 잘 몰랐다. 

우리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어쨌든 나로서는 그 친구를 정말정말 좋아라 했고, 그 친구도 나를 굉장히 좋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약속도 잡고, 그래서 만난 것인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둘이 만나면 이렇게 어색하구나. 나는 말주변 없고 재미없는 나를 탓하며, 죄책감을 느끼며 말했다. "재미없지? 미안, 내가 말을 잘 못해서..." 

"아니, 나는 괜찮은데?" "어색하고 민망하지 않아?" "아니, 전혀.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 그냥 같이 있으니까 좋다. ^^; "

그 친구의 말은 다소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럴 수도 있구나.

하긴 그럴수도 있었다. 나도 그랬어야 마땅했다. 그렇게나 내가 좋아하고 또 존경해 마지 않던 성품을 가지고 있던 그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해할 성격의 만남은 아니었지 않나.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그것보다 조금 더 편한 사이를 원했음을 깨달았다. 물론, 나에게 그것을 한 마디로 깨닫게 해준 그 친구에 대한 호감도가 더더욱 상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한시간 동안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나에게 그러한 침묵의 대화시간은 익숙치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방이 그러한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적이 마음을 놓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편했다. 각자의 사색에 잠긴 채, 이따금 말을 하긴 하였으나, 침묵의 대화 시간이 음성의 대화 시간보다 몇 배나 많은 그러한 특이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그것은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서로에게 전혀 무관심하지 않은채, 서로를 의식하며, 각자의 사색에 잠긴 것. 각자가 서로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자각하고, 서로 크게 다르지 아니한 사색과, 혹은 서로에 대한 사색을 하고 있는 그 시간은 말없는 대화의 시간이라고 불러야 옳았다.

아마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침묵의 대화를 어색해하지 않게 된 것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날 이후로 나는 대부분의 대화에 있어서 침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러면 대화를 끊고 사색에 잠기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절대 그 사색에 있어 상대를 소외시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소한의 대화는 유지시키고자 했던 의도였다. 상대를 두고서 생각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하여.

하지만 침묵의 대화에 있어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와 함께 하고, 보내고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일인 것 같다. 우리의 한번밖에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을 상대와 함께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침묵의 시간도 의미를 갖는다. 나는 대화의 소재가 떨어지면 편안한 마음으로 침묵을 즐기고, 앞에 있는 상대를 음미하듯 관찰하곤 한다. 이 사람은 어떠어떠한 사람이구나. 얼굴은 저렇게 생겼고, 이런 버릇이 있구나, 무엇을 좋아하는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나는 상대에게 내 시간을 선물한다. 그 시간은 온전히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고,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내 삶의 일부에 각인되게 된다.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대화의 순간보다 더더욱 풍요롭고 수준높은 교류와 기억의 시간이다.

그 날이후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침묵의 대화를 깨친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지금 편안하게 느낀다고 말해주어도, 상대방이 침묵의 대화법을 깨치는 경우도 드물었다. 서투른 사람들은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고 그 자리를 불편해 했고, 어떤 사람들은 대화를 끊고, 즉 상대의 존재를 잊고 혼자만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계속되는 침묵 대화법의 실패 속에서 나는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간파해낼 수 있었다. 침묵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나에대한 관심도나, 대화의 기술 같은 것들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침묵을 어색해하며 몸둘바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화의 기술에 어색하거나, 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말해보고자 노력했고, 또 말재주 없는 자신을 탓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람들일수록 침묵을 재미없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반면, 침묵을 틈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리거나, 그 자리를 피해가거나, 왜 그렇게 너는 재미없는 사람인가 라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는 그들이 대화의 기술이 부족하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며, 또 나에 대한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마지막 유형의 사람들은 침묵을 용납치 않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로 대화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곤 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관심이 어떠한지, 상대방을 존중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대화를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대화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 대부분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부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도, 단순히 그 자리에서의 어색함을 깨기 위한, 그저 대화만을 위한 대화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 자리는 정말 알맹이가 없는 대화들도 꽉 차고는 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침묵의 대화를 만족스럽게 나눈 적은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몇 번 침묵의 대화를 하긴 했지만, 그 첫날의 대화만큼의 밀도는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날 만큼 서로를 그렇게 높이 보고, 존중하였던 만남이 없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 날의 그 친구처럼 능숙한 대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을 못 보았기 때문인 것도 한 몫할 것이다.


P.S. 오해할까봐 말하는데 ; 내가 갈망하는 것은 침묵의 대화인 것은 아니다. 침묵이든 아니든, 언제고 밀도있는 꽉찬 대화가 좋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상대방에 대한 강한 관심과 편안한 분위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by mystery | 2008/03/22 02:26 | 항해일지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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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Videotape at 2008/03/22 12:07

제목 : 소통 1
어색치 않은 침묵 타인과의 소통 속에서, 난 항상 침묵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 왔던 듯 하다. 침묵을 대화의 단절로 느끼고 항상 그 공백을 채우려 한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들과의 어색함을 없애주는 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대화의 80% 정도는 쓸데없는 내용으로 채워졌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more

Commented at 2008/03/22 12:0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이상주의 at 2008/03/23 01:30
뭘 그리 신경쓰나ㅋ 침묵이든 아니든 간에 그냥 편안한 느낌이 중요한거 아니야? 내가 볼 때 침묵의 대화법을 깨우친 것에 좌우받는게 아니라 서로 상대방이 얼마나 편하다고 느끼는지에 좌우를 받는거 같은데..-_-;
Commented by mystery at 2008/03/23 03:11
Idioteque// 글쎄 -_-;; 기억이 안나는걸 ㅋㅋ 그저 감기약 먹고 정신이 없어서 멍하니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ㅋ

이상주의// ㅋㅋㅋ 이 글에도 이런 답글을 달까 생각했는데 정말 똑같이 다네 ㅋㅋ '뭘 그리 신경쓰나ㅋ'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수도 있겠다. 침묵의 대화법이라는게 사실은 상대방을 얼마나 편안하게 해주느냐일지도 모르겠네. 그치만 그래도 침묵의 대화법은 유효한것 같아. 글에서 이야기한 친구랑 나는 서로 정신적인 면을 흠모하는 사이라고 할까 ㅋㅋ 뭐 그런 사이긴 했지만 특별한 교류는 없었고 간접적인 관계였기에, 친하거나 편하다고 할 수는 없는 사이인데다, 그 날 단 둘의 만남도 정말 이유도 없고 당위성도 없는 엉뚱하고 생뚱맞은 약속이었어.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 라는 뜻의 만남이랄까. 내가 가장 감탄한건, 어색한게 당연한 자리에서 침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러한 침묵을 무의미한 소통부재의 시간으로 여기지 않도록 느껴지게 하는 그 친구의 태도였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고, 또 그렇다고 그 시간에서 상대를 소외시키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지 않는 태도.
Commented by Idioteque at 2008/03/24 16:41
그런거였어... 그냥 멍한 거였어.. ㅋㅋㅋ
Commented by gp_baboo at 2008/03/25 23:08
대충 누군 지 상상이 가는군...ㅋㅋㅋ
Commented by mystery at 2008/03/28 13:20
gp_baboo// 오오 ;; 그러면 안돼는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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