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대학원에 진학하고 학부 09학번들과 같은 학년이 되었다. 나는 대학원 본과 11학번. 그들은 진입 본과 11학번. 이미 2년 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나보다 2~3년 어린 아이들의 세계와 융합되는 과정은 말그대로 작은 문명의 충돌과도 같았다. 아니, 나라는 작은 행성이 전혀 낯선 거대한 은하계에 정면 충돌하는 느낌.
그래서일까, 나는 익숙한 세계의 냄새를 금방 찾아냈다. 와인 동아리. 대학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축이 된 그 동아리는 학부 시절 열심히 했던 클래식 기타 동아리와 아주 느낌이 비슷했다. 적당히 교양을 추구하는 사람들. 적당히 나사가 풀린 사람들. 적당히 원만한 사람들. 적당히 예의를 갖춘, 그러면서도 끈끈한 세계.
작년 가을학기에는 모험을 결심했다. 아시아 ㅇㅇㅇ 연합. 여기서 열심히 활동을 하다보니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나게 되었다. 매일 같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스케쥴이 빈틈이 없어질 정도로 빡빡해졌다. 가톨릭 봉사 동아리도 들어갔는데, 이것도 역시 우리 의대에서 거의 최대 규모인지라 만만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도저히 감당이 안될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어림잡아 400명은 될 듯. Facebook에서 그 시기에 추가된 사람들만 300명은 쉽게 넘어가니까. 거기에다가 새로 의대에 들어가서 만난 친구들까지 합치면 작년 한해에 새로 사귄 사람들만 족히 최소 500명은 넘어가는 셈이 된다. !!
그러다보니 어째 매일 보는 사람들을 보면 식상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던 적이 있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을 보다보니 거기에도 중독이 되는 것이다. 일주일동안 10명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를 포만감에 젖고. 아무런 약속이 없는 하루를 보내면 허전함에 젖고.
그렇게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한해를 보냈다. 나름 재미도 있었고. 얻은 것도 많다.
허파에 들어간 바람은 이제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 막 나대거나 앞장서 나서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을 의대에서는 더 좋아한다는, 알아준다는 지도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은 것도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함께 팀을 이루어 일을 하던, 에너지 넘치는 친구들이 다들 각각 자기 일을 찾아 떠나면서 어째 생각보다 일이 재미가 없어진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되겠다. 물론 그런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 좋은 리더의 역할이겠는데, 나는 그런 레벨의 리더까지는 안되기 때문이렷다. 뭐랄까, 나는 개혁보다는 안정적으로 일을 받아 넘겨주는 쪽인 듯.
만남이 많던 기간에 만남이 없는 날은 도리어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지듯이, 의욕이 떨어진 지금에 와서 많은 일들이 쌓여 있는 것들 역시 더 스트레스 받고 사람을 지치게 한다.
학생회 국장 - 매달 봉사활동 기획, 방학 봉사활동 기획, 봄 축제 준비, 정기적인 학생회 회의, 상징의류(과티) 제작팀장
아시아ㅇㅇㅇ연합 캠페인 팀장 - 컨퍼런스 참가시 발표할 Film, Photography, Public Poster 제작, 2014년 한국 컨퍼런스 유치팀 중 Delegate management 팀장, 차기 서울대 회장, 자선 와인파티 기획팀
가톨릭 동아리 - 2주에 한번씩 봉사활동, 축제 주점 준비 도와주기, 동아리 행사 참여
와인 동아리 - 한달에 한번씩 세미나
스터디 팀 - 족보 풀기 등 과제
의대생 - 살인적인 시험일정. (학교 커리큘럼상 가장 빡센 2학년)
"지금이 아니면 못해" "시간 조정 잘 하면 할 수 있어" 하면서 하나 둘 씩 집어들었던 자리나, 일들에다가... 그런 일들을 하니까, 그런 자리에 있으니까 하나 둘씩 던져주는 일들까지 더해지니.. 어마어마한 일들이 쌓여버렸다. 거기에다가 저기에 써넣기엔 사소한 일들까지.. 지도교수님께 배정된 지도학생 중 내가 최고참이라서 예과학생들까지 다 연락을 돌려야 한다거나. 가톨릭 동아리에서 후배 한 명 찍어서 점심먹기 약속을 잡아주는거나. 동아리라서 MT라든가, 홈커밍데이에 참여해야 하는 거. 혹은 가끔 있는 의대내 고등학교 동문회 술자리까지. 이거. 반작용이 정말 크다.
한가지 위로라면
반작용에 대한 반작용도 있다는 거다. 일들이 많이 쌓여서 힘들게 일하는 만큼.. 보람이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는 것들이 많다는 점.
두가지 위로라면
얼핏 많아보이는 일들이지만 꾸역꾸역 다 해내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항상 공부에 최우선적인 무게중심을 두어서,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일을 한다는 거. (덕분에 다른 일들을 잘 안하는 뺀질이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
학부 때 동아리 회장을 하고, 그런 부수적인 일들에 짓눌려 제 할일(=공부)을 못하고 결국 파국에 치달았던 적이 있었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고, 모든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게 된 때가 오긴 했는데... 그로부터 2년동안 난 정말 거의 완벽하게 은둔생활을 했었다. 정말 모든 책임이란 책임에서 도망 다녔다. 그게 바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작용이 크면, 그 반대편으로 멀리멀리 도망가 버리는.
이번에 맡은 일들이 그때처럼 되어 버리면 또 한없이 깊고 깊은 구멍 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게 내 눈에 뻔히 보인다. 솔직히, 지금 맡은 일들 때문에 빼앗기는 시간들 생각하면 아깝기도 하다. 그 시간 전부 공부에 투자하면 어떨까. 이런 거 생각하면 의대생도 할만 하단 말이지. 정말 눈 꽉 감고, 공부만 한다면. 그치만 사람 맘이 사람 맘대로 되는게 아니라, 야구도 보고, 누구는 게임도 하고, 누구는 과외하며 돈도 벌고, 누구는 TV, 드라마도 보고, 누구는 음악학원 다니며 취미생활도 하고 그런 거지. 사람이니까. 꽤나 바쁘다고 하는 KAIST 공대생들도 의대생들이 얼마나 시간을 쪼개서 그런 걸 하는지는 상상 못할 것 같다. 놀 거 다 노네?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9시부터 5시까지 빈틈없이 수업을 듣고, 그렇게 1주일동안 오로지 한과목의 수업을 듣고, 1주일만에 한 과목 교과서를 다 나간후, 바로 시험을 치고, 시험 친 다음 날 다시 새로운 과목을 나가는.. 그런 팍팍한 생활 속에 살다보면, 정말 어쩔 수 없이 칼 같은 시간관리능력이 생기고야 만다. 수업이 5시에 끝났으니까 7시까지만 딴짓을 하고, 그때부턴 공부를 하는거다. 12시까지 5시간동안. 그것도 모자라면 수업사이 쉬는시간 10분도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수업을 정말 집중해서 열심히 듣기 시작한다. 수업 끝난 10분 동안 족보를 풀어본다. 혹 주중에 밀린 공부가 있으면 주말에 반드시 끝낸다. 아니면 답이 없는걸 1년동안 하면서 알게 되거든. 이것도 수많은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다. 공부 안해서 망하고. 시간이 모자라서 망하고. 치밀하게 더 시간을 끌어올 시간이 없는지 고민하고. 새로운 공부방법을 시도해보고. Feedback을 받고.
하여튼. 뭔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이 몰려서 좀 걱정스럽다. 여기서 실패하면 안돼. 절대. 반작용이 겁많은 나를 어디로 밀어넣을지 뻔히 보이니까.
그래도 이거 다 끝나면 일 좀 줄이고 휴식 시간은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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